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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와 더불어 [[신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개척자중 한명으로,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으며, 특히 미학 이론에 있어 그 어떠한 철학자들보다도 깊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 생애 == 루카치는 1885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인 트란스라이타니아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헝가리인이었지만 유대계 헝가리인이었으므로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독일어에도 능통했다. 루카치는 독일 유학 과정에서 짐멜, 베버 등 저명한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신칸트주의자에 가까웠으나, 점차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탈인간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상이 변하면서,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워졌다. 1917년, 루카치가 30대일 때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루카치가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하는데 계기를 준다. 그러나 루카치는 2년 후 세워진 헝가리의 공산주의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가 정권이 붕괴되며 소련으로 도피해야했고, 30년간이나 망명 생활에 오르는 고생을 겪는다. 소련 시절, 루카치는 변변찮은 대접을 받았으나, 이로 인하여 운 좋게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ref>그와 같이 망명길에 오른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장 [[벨러 쿤]]은 숙청당한다.</ref> 하지만 그는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정치가로서의 꿈을 접고, 정치나 사회 철학을 전개하는 대신 미학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 부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그는 공산화된 조국으로 돌아왔으며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명목상 최고 수준 이론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부분적으로 비판적이었던 루카치는 공산당 정권에 찍혔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임시 문화부 장관을 맡았던 것을 빌미로 헝가리 공산당 정부는 루카치를 공산당에서 출당시키고 루마니아로 추방시켰다.<ref>당시 루카치는 민주 사회주의 정권의 수장이었던 [[너지 임레]]와 같이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숨어있었는데, 헝가리 정부가 체포하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해 너지 임레와 같이 대사관 밖으로 나갔다가 숨어있던 KGB 조직원들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루카치는 너지 임레에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처형당하지 않고 루마니아로 추방되는 선에서 그쳤지만 너지 임레는 소련에서 처형당한다.</ref> 시간이 흘러 루카치는 헝가리에 귀국할 수 있게 되었고,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에도 복당되었다. 그러나 이미 80대의 고령이었던 루카치는 4년 뒤인 1971년, 회고록을 위한 구술을 마친지 1개월만에 숨을 거둔다. == 이념 == 루카치는 [[게오르크 짐멜]]을 지도교수로 두어 박사 과정을 마친 인물이며, 따라서 베버, 짐멜 등 선대 독일 사회학자의 영향을 수용했다. 특히 칸트의 영향을 초기 상당히 받았다. 중후기 사상에서는 헤겔과 레닌,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철학적인 방향 속에서 루카치는 [[인본주의]]적 철학 이념을 사수하려는 일관적인 흐름을 보이며, 그러한 경향은 특히나 후기 철학에서 강화되었다. 루카치의 후대 철학자인 G. 파스테르나크 (G. Pasternack)에 의하면, 루카치의 미학이론은 초기, 중기, 후기에서 "미학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일관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용문|1) 원리로서의 탈 실용화: 통일적이고 직접적인 생활 연관의 구조적 중단<br>2) 총체성: 전체성으로의 지향을 지닌 작품세계의 구조적 완결성<br>3) 원리로서의 리얼리즘: 미메시스적 형성물의 구성과 현실 인상의 환기에서 이루어지는 미메시스적 재생산과 현실 경험의 연관화<br>4) 원리로서의 특수성: 감각적으로 명백한 것의 개별 보편화 가능성<br>5) 자의식화: 인간유의 자기의식으로서의 주체성의 탈개별화}} === 총체성(Totalität) === {{인용문|총체성의 유물변증법적 개념은 무엇보다도 먼저 상호작용하는 모순의 구체적인 통일을 의미한다. … 두 번째로, 모든 총체성의 체계적인 상대성 문제이다.(모든 총체성은 그것에 종속된 총체성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문제의 총체성은 좀 더 높은 단계의 복잡성을 갖는 총체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모든 총체성의 역사적인 상대성을 의미하는 바, 즉 모든 총체성의 전체적인 성질은 변화하고 분열하며, 구체적인 역사의 시점에 의해서 제약된다.|게오르크 루카치}} 루카치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개념인 '''총체성'''은 예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총체성은 거시성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그러한 총체성은 자본주의로 인하여 붕괴되었다. 루카치는 자본주의의 분업성을 그 예시로 들었는데, 그는 분업을 "진보의 모순성"이라고 분석해낸다. 우선 분업은 일단 인간의 전체성(Ganzheit)를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능력을 인간 속에서 일깨우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업은 전체적으로 인간을 풍요롭게 만들지언정 개개로서의 인간을 하찮게 만든다. 그리하여 분업은 총체성을 갖춰야할 예술을 일면적으로 편협하게 만들었다. 루카치에 의하면, 분업에 의한 미학의 변질은 "직접적인 현시 기법의 아틀리에적 문제"이자, "문학에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한정짓고, 상품화한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지식인은 일개 글쓰기 전문가로 전락하게 되며, 아틀리에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전문가들은 자본주의적 분업의 악효과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문화와 예술은 보편적 상품화가 되어, 예술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숭고함마저 가격으로 환산되어 순수 예술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에 대항하는 '''총체성'''의 개념은,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범위에 제한을 두지 말고, 지식인이 소설, 문예 비평 등 여러 형식을 통해 자신의 지배적 실존 구성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맡는 등, 전반적인 거시성을 추구하는 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물화(Verdinglichung) === 루카치의 사회학, 미학, 정치학 이론중 가장 두드러지면서 관심을 받는 이론은 바로 물화이다. 물화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인간의 관계가 점차 물질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자본주의 내에서는 인본주의가 상실되고 오직 기계적인 물신주의만이 남는다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계승되어,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체제에 비하여 자본주의에서는 상품 구조가 지배적인 구조가 되는데, 루카치는 이런 자본주의의 특성이 인간이 지각하는 현실, 진실의 삶(wirklich)을 지우고, 실제 세계와 다르게 현상히게 만든다고 보았다. 상품, 화물, 가격 같이, "상품화"되고 "사물화"된 범주들과 관계들이, "사랑", "우정" 같은 현실적인 범주와 관계를 대체함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질-추상적인 사회의 힘이 현상 및 작동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현실적인 존재를 탐구하는 문학과 예술에 있어 불리하게 작동하며, 따라서 루카치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예술에 더 불리한 조건이 성립된다고 바라보았다. === 미메시스(Mimesis) === {{인용문|kein Objekt ohne Subjeck<br>주체 없이 객체 없다.|게오르크 루카치}} 루카치는 반영론적인 관점을 견지하였으나, 소비에트 철학에서의 반영론에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루카치가 인식한 후, 그는 레닌의 반영론 관점을 계승, 발전시킨 자신의 개념을 '''미메시스'''라고 명명하였다. 일반적으로 미메시스라고 하면, 반영을 내포하는 모방(nachahmung)을 의미한다. 즉 현실의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미메시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 철학에서는 "루카치적 반영론"의 동의어로서 사용된다. 루카치는 미메시스가 모든 고등 유기체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생활과 생존만을 위해 미메시스를 수행하는 다른 유기체와 달리, 예술적인 면에서 미메시스가 활용되며, 미메시스는 예술의 본질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예술은 객관적인 현실을 주관적으로 인식하여 반영하는 행동이고, 여기에서 인간은 그러한 예술 활동을 하는 대상적 활동 및 실천의 주체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루카치는 또한 과학적 반영과 미적 반영을 구분지어 설명하고자 했다. 루카치에 따르면, 과학적 반영은 모든 인간적 감각, 감정, 정신적 한계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인식과 무관한 객관적인 객체 묘사를 요구하므로, '''탈인간연관적 반영'''(desanthropomorphisierend)에 속한다. 반면, 미적 반영은 인간의 세계에서 출발하고, 인간의 세계를 주관적으로, 주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인간연관적 반영'''(anthropomorphisierend)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치는 미학이 "kein Objekt ohne Subjeck", 즉 주체자가 없이는 객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루카치의 후기 미학에서, 예술은 대상(객관적 사실)을 인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대상의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인간의 자의식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을 하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고양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예술적인 형식은 체험을 유발하고, 감정을 환기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한 체험 및 감정의 환기 과정에서, 예술을 관찰하는 사람은 예술이 담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인 맥락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위치한 자기 자신이 어떠한 대상인지 재발견한다. 이를 통하여 인간은 예술을 통하여 자의식을 일깨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휴머니즘]]은 미메시스적인 예술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루카치는 주장한다. === 휴머니즘적 예술 === {{인용문|문학은 궁극적 차원에서만 시대의 사회적 연관 관계를 건드리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이라는 직접적 연관성을 반드시 보여줄 필요는 없는 “개별적 인간과 개별적 운명들의 헌시”이다.|게오르크 루카치}} 루카치에게 있어 예술은 따라서 '''이상적 존재로서의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기능'''을 맡는다. 예술을 정치적 기능으로서 바라보았던 마르크스나 레닌에 비해, 루카치는 보다 휴머니즘을 예술의 본질로 생각하였다. 루카치에 의하면, 휴머니즘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성질이다. 진정한 문학과 예술은 예술가의 주관적인 의도와 상관 없이 비인간성과 비인간적 경향에 맞서 인간의 온전성을 옹호하고, 인간의 인간화에 기여한다. 또한 미시 담론에 치우치지 않고, 총체성을 추구함에 따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거대한 역사를 구성하고 인본주의를 옹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예술은 그 자체로서 정치적이지 않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적대성을 가지기도 한다. 일단 예술은 정치적인 의견을 내지 않더라도, 반인본주의에 속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 인본주의를 조명함으로서 무의식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예술과 문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은 인본주의적인 이상, 즉 공산주의로 인간을 이끄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을 위해서 루카치는 '''지적, 도덕적 도야'''라는 개념도 내세운다. 아무리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삶에 생기는 이데올로그적 파열구, 즉 "사이 세계들"(Intermundien)을 막을 수는 없다. 개개인은 그러한 사이 세계를 예수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적 장막을 뚫고 나가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적 이데아로 사회가 전진하는 근거가 된다. == 영향력 ==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는 마르크스주의를 접근하는 두가지의 방식인 "인본주의"와 "과학주의"의 흐름에서, 인본주의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일컬어지는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대변되는 이 "비판 이론가"들은, 루카치의 물화 개념 등, 자본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루카치의 연구를 상당수 빌려와 후대에 발전시켰다. 한국 국문학에서도 루카치는 1990년대까지 주로 인용되는 철학자였으며, 현재는 그에 비해 인용 빈도수는 떨어지나, 여전히 "넘어야하는 미학의 높은 산"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다. == 비판 == [[한스 요나스]]를 위시로 한 반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루카치의 "인본주의성"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며 따라서 생명 윤리에 대해 별다른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루카치의 철학은 전면적인 재검토의 단계에 들어가는데,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주체성 위에 존재하는 "구조"에 대한 철학이며, 그러한 구조의 관계를 관찰하고 이를 통하여 구조를 타파하는 계급투쟁을 강조해야함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루카치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지나치게 인본주의에 평중되어있기 때문에 구조보다 인간이 앞서고, 따라서 진정한 혁명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알튀세르는 비판했다. 이러한 관점은 [[구조주의]]의 시각에서의 루카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알튀세르는 레닌에 대한 루카치의 해석이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 여담 == * 헝가리 내에서의 평가는 그의 명성에 비해 높지 않은 편이다. 공산 정권 시절, 루카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현실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이었으므로 공산당 고위 당직자들에게 미움을 샀다. 민주화 이후에 들어선 오르반 빅토르의 극우파 정권은 공산 정권 시대에 지어진 루카치 도서관과 동상을 철거하였다. 이렇듯 루카치는 학문적 성과에 비해 조국에서 박한 대우를 받고 있다. == 각주 == [[분류:1885년 출생]][[분류:1971년 사망]][[분류:헝가리의 철학자]][[분류:마르크스주의 철학자]][[분류:미학자]][[분류:헝가리의 공산주의자]][[분류:비판 이론]][[분류:신마르크스주의]][[분류:마르크스주의 철학]][[분류:마르크스주의 미학]] 요약: 이음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음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대륙철학 (편집) 틀:인용문-따옴표 (편집) 틀:인용문2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