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연혁 == [[일본사회당|사회당]]계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민주사회당 (일본)|민사당]]계의 [[전일본노동총동맹]](동맹), 중간파인 [[중립노동조합연락회의]](중립노련), 전국산업별노동조합연합(신산별) 4개 노총을 통일해야 한다는 "노동전선통일(労働戦線統一)" 운동은 1960년대 후반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1986년 [[일본사회당의 신선언]] 채택 이전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자위대]] 해산, [[일장기]]·[[기미가요]] 반대, 탈원전을 주장한 총평(공공부문 노조 중심)과 승공 사민주의를 내세우며 자위대·미일안보·일장기·기미가요에 찬성한 동맹(사기업 노조 중심)은 물과 기름 관계였다. 1982년 12월 14일 [[전일본민간노동조합협의회]](전민노협)이 결성되면서 4개 노총 통일운동은 크게 진전했다. 전민노협이 1986년 11월 제5차 총회에서 이듬해 가을까지 연합체로 이행할 것을 확정함에 따라, 우선 동맹이 1987년 1월 제23회 연례대회에서 해산방침을 결정하고, 총평, 중립노련, 신산별 3노총도 가을까지 "연합"에 합류할 것을 결정했다. 1987년 11월 19일 동맹과 중립노련이 해산하고 다음날인 11월 20일 55개 산별, 조합원 539만 명의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이 발족했다. 신산별도 1988년 10월 해산하고 합류했다. 총평은 1989년 9월의 제81회 정기대회에서 11월 해산을 최종 확인했다.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도 1989년 9월 정기대회에서 연합 가맹을 결정했다.<ref>『週刊労働ニュース』1989年9月11日号</ref> 1989년 11월 21일, [[도쿄후생연금회관]]에서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 회장에 [[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연합회]](정보통신노련) 위원장 [[야마자키 아키라]]가 선출되었다. 총평계 산별들까지 더해 78 산별, 조합원 약 800만 명이 결집되었다. 야마자키는 “노동전선 통일의 공적”에 따라 2000년 5월 [[서보장|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연합 출범을 “노동계의 우익 재편,” “반공・[[노사협조]] 노선”이라고 공격한 [[일본공산당|공산당]]계의 [[통일전선촉진노동조합간담회]](통일노조간) 등은 이에 대항하여 연합 결성과 같은 날인 1989년 11월 21일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련)을, [[사회당 좌파]]계의 총평 좌파는 12월 9일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 (1989년)|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협)을 결성했다. 요약: 이음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음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3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스크립트 오류가 있는 문서 분류: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분류: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