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구로동맹파업 === 1980년 서울대학교 최초로 총여학생회를 창설하고, 서울대학교 초대 총여학생회장이 되었다.<ref name="seoul.co.kr">{{뉴스 인용|저자=이현정|날짜=2012-10-23|제목=동지였던 두 여인, 앙숙이 되다|url=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1023002006|출판사=서울신문|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90121010732/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1023002006|보존날짜=2019-01-21|확인날짜=2022-02-04}}</ref> 그 해에, [[위장취업]]으로 [[구로공단]]으로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등 노동운동을 펼쳤다.<ref name="%25EC%259D%25B8%25EC%2582%25AC">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56-73쪽</ref>대우어패럴 미싱사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고, 1985년 6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기 최초의 정치적 연대파업투쟁인 [[구로동맹파업]]에 나섰다.<ref>{{뉴스 인용|저자1=박주연|저자2=김세구|날짜=2008-03-04|제목=[아주 특별한 인터뷰]새로운 진보 꿈꾸는 심상정 의원|url=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6991|출판사=주간경향|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220204114536/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6991|보존날짜=2022-02-04|확인날짜=2022-02-04}}</ref>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대한민국의 고속 성장의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고, [[1980년대]] 초에도 이러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ref>역사학연구소,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 서해문집, 2006, 156-157쪽, {{ISBN|89-7483-215-1}}</ref>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만으로도 사상이 불온한 자로 낙인찍혔으며 노동조합과 관련되어 해고될 경우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직장을 구하는데에도 차별을 받았다.<ref>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6, 443쪽, {{ISBN|89-7483-208-9}}</ref>1983년부터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여러 사업장에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파업은 자본가들과 결탁한 구사대의 폭력과 경찰의 탄압 속에 1주일만에 끝났다. 이 사건으로 44명의 노동자가 구속되고 1천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다.<ref>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104쪽</ref>1984년 노조결성 및 쟁의로 수배 중이었던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으로 인해 주동자로 지명수배되었다. 당시 상황을 심상정은 이렇게 회고 하고 있다. {{인용문2|파업 닷새쯤 되던 날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보던 중 화면에서 "1계급 특진, 현상금 5백만원"이 걸린 내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언론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었다.……당시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까지 걸려 있었다. 붙잡히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극악한 인권 탄압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심상정<ref>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레디앙, 2008년, 44쪽, {{ISBN|89-959952-2-X}}</ref>}}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으로 1993년까지 10년간 수배되었으며, 1993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ref name="%25EC%259D%25B8%25EC%2582%25AC"/> 한편 2001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구로동맹파업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하였다.<ref>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레디앙, 2008년, 50쪽, {{ISBN|89-959952-2-X}}</ref> ==== 서울노동운동연합 ==== {{참고|서울노동운동연합}} 구로동맹파업 이후 심상정은 조직적인 민주노조운동에 나섰다.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정권의 탄압으로 개별 기업 단위 노동조합만으로는 노동기본권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1985년 8월 심상정은 기업 단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 정치 조직으로서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 창립에 함께 하였다. 서울노동운동연합은 노동조합의 교육과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으며<ref>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8, 188쪽, {{ISBN|89-7696-526-4}}</ref> 1986년 5월 1일 [[구로공단]]에서 [[노동절]] 기념집회를 주도하였다.<ref>역사학연구소,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 서해문집, 2006년, 162쪽, {{ISBN|89-7483-215-1}}</ref> 1986년 5월 4일 [[전두환]] 정권은 서울노동운동연합을 [[국가보안법]]에 의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이들을 연행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수사관할권이 없는 [[보안사령부]]를 동원하여 관련자를 구속하고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로 조직사건을 만들어내었다.<ref>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 역사비평사, 2008, 275-276쪽, {{ISBN|89-7696-303-2}}</ref> 이로 인해 서울노동운동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심상정은 체포를 피해 수배생활을 계속했다.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 {{참고|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와해 이후에도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민주화와 노동권의 확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심상정은 1988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창립되자 쟁의국장과 조직국장을 역임했다.<ref>[http://wbook.liso.net/view.asp?menucode=read&book=2&number=1071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정책실, 편집실 등] {{웨이백|url=http://wbook.liso.net/view.asp?menucode=read&book=2&number=1071 |date=20160304104521 }}, 전노협 백서</ref>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수원]]의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단병호]]를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원래 [[서울대학교]]에서 열려고 하였던 이 대회는 [[노태우]] 정권이 경찰을 동원하여 원천봉쇄하여 수원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창립 행사가 끝나자마자 130여명의 노동자가 연행되었다.<ref>[http://koreanliterature.kaist.ac.kr/leesangkyung/picture/picture_28.htm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교수의 홈페이지 자료]{{깨진 링크|url=http://koreanliterature.kaist.ac.kr/leesangkyung/picture/picture_28.htm }}</ref> 한편, 심상정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창립일 하루 전 경찰에게 연행되어 창립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경찰서에서는 10년의 수배 생활을 해온 노동운동의 거물이 잡혔다며 "얼굴좀 보자"고 경찰들이 몰려들었고 창립식은 텔레비전으로 보아야 했다. 심상정은 불구속으로 기소되어 1993년 법정에 섰다. 선고 공판이 있는 날 심상정은 만삭의 몸이었다. 판사는 "무죄를 선고하고 싶으나 관련법규가 최소한 집행유예를 선고하게 되어있다"는 설명과 함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ref name="s49_50">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레디앙, 2008년, 49-50쪽, {{ISBN|89-959952-2-X}}</ref> 심상정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을 위해 발전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조직국장 등의 역할을 맡아 일했으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 {{참고|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창립되었다. 창립당시 862개의 단위 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하였고 조합원 수는 42만여 명이었다.<ref>계명대학교 출판부, 한국역사의 이해, 2008년, 290쪽, {{ISBN|89-7585-068-4}}</ref> 심상정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민주금속연맹과 금속산업연맹의 사무차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금속연맹은 산업별 노동조합인 [[전국금속노동조합]]으로 발전하였다. 심상정은 전국금속노동조합에서도 계속하여 사무처장을 역임하였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은 2003년 대한민국 최초로 산별중앙교섭을 통해 노동조건 개선 및 임금삭감없는 주 5일 근무제를 합의하였다. 심상정은 금속노동조합의 일을 하면서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었다.<ref name="s49_50"/> 2003년, 심상정은 그해 9월 [[금속노조]] 사무처장직을 물러나 진보정치 운동을 시작하였다. 요약: 이음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음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2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TemplateStyles 오류가 있는 문서 분류: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