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일제 침략정책 적극 수행 ==== 일진회가 창립발기된 처음부터 해산될 때까지의 시일을 전후해서 일본 국수주의자들이나 낭인들이 각각 막후의 조종자나 고문으로서 일제의 침략과 일진회의 매국 행각을 위한 계책을 전수하였으며, 일진회원들은 그들의 계책을 실천하는데 급급했다. 우선,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에 직접 협력한 것이다. 일제가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에 [[대한제국]]과 맺은 [[한일의정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이른바 '고문정치제제'를 확립하여 식민지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일진회는 일제 당국에 협력하는 적극적인 행각으로서 일제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군을 위해서 북진수송대의 군수품 운반([[1905년]] [[6월 10일]]~[[1905년]] [[10월 20일]]), [[함경도]]로부터 [[간도]]에 이르는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에 대한 동태를 정탐하고, [[경의선]] 철도부설공사([[1904년]] 10월 ~ [[1905년]] 9월)를 일제가 급격히 서두르자 일진회원들은 자진해서 이 공사에 20여만 명의 회원을 거의 무보수로 노역을 동원하였으며, 100여명의 사상자까지 내어 큰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이 일제에서 유리하게 종결되고, 이 무렵 [[영국]], [[미국]] 등 열강과의 국제적인 균형과 체면을 무난히 유지해 가면서 [[1905년]] 7월에 [[미국]]과 비밀리에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8월 영국과 맺은 제2차 [[영일 동맹]], [[1905년]] 9월에는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이 성립됨에 따라 동양의 대세는 일제에 의해 좌우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다는 소문이 유포되고 [[대한제국]]의 조야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일진회에서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일본인 고문이 기초한 문건인 선언서에 수정을 가하여 [[1905년]] [[11월 6일]]에 외교권의 이양을 제창한 이른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의 보호지도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는 것으로서 [[을사늑약]]이 강요되기 10여일 전에 발표된 이 선언서는 일진회의 매국 행위 정체를 공표한 것이었다. [[11월 17일]] 일제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완전히 강탈되고, 이듬해 2월에 일제 통감부가 [[한성부]]에 설치되었으며, 조약 체결의 주동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일제 식민지화의 제일보가 된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군부의 보호하에 있던 일진회는 그 관계를 끊고 통감부의 휘하에서 일본인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더욱 매국 행위 앞잡이에 들어갔다. '일진회 선언서'와 을사늑약에 대한 전 국민의 격분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 반면에 일진회원들은 부일행위의 반대급부로 조약이 체결된 직후 군수로, 반년 후에는 관찰사(도지사)까지 기용되고, 드디어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뒤에 내부대신에 승진)이 되었다. [[파일:일진회 대형아치.jpg|섬네일|300px|오른쪽|[[1907년]] 일진회가 일본 제국 황태자 [[다이쇼 천황|다이쇼]]의 [[대한제국]] 방문 때 서울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 사진에는 일진회의 이름이 담긴 대형 아치 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해 있으나 아치의 중간에 '받들어 맞이한다'는 의미의 '봉영(奉迎)'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제는 일진회를 이용함으로써 침략정책을 무난히 강행하려고 했다. 한편, 일진회는 기관지 [[국민신보]]를 발간해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적극 옹호했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하여 송병준은 이완용과 결탁하고, 일제 당국에 영합해서 고종황제의 양위를 강요,협박하고 동시에 일진회원들에게 양위를 재촉하는 시위를 하게 하여 마침내 [[고종 황제]]는 양위를 하게 되었다. 일제는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의 내정간섭을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1907년]] [[7월 24일]]에 [[신문지법]], [[7월 27일]]에는 [[보안법]]을 공포케 하여 한국민의 정당한 의사표시와 항일운동, 애국계몽운동에 규제를 가했다. 여기에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가 일차적으로 해산을 당했다. 이어 한국군의 해산이 단행되어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일제는 막대한 병력과 군비를 투입하여 무자비한 살육전을 펼쳤고 일진회는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ref>[https://kotobank.jp/word/%E6%AD%A6%E7%94%B0%E7%AF%84%E4%B9%8B-1088669 武田範之(読み)たけだ はんし]</ref> 등의 조종하에 의병을 진압할 이른바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토벌에 앞장섰으며 심지어 의병을 '폭도'로 여겼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매국 행각은 당시 의병들로부터 커다란 분격을 사게 되었는데,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입은 일진회원의 피해는 사살자 9260명, 부상자 10명, 소각가옥 360호, 재산 손해액 5만 501원 31전에 달할 정도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무수한 일진회원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10월 일본 제국의 [[다이쇼 천황|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내한하였을 때에도 일진회는 일본인 고문의 조종하에 환영녹문(歡迎錄門)을 세우고, 토산물 헌납과 제등(提燈) 행렬등 맞이했다. 일진회는 경향각지에서 유세,강연회 등을 거듭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성격에서 보아 국민들을 선동하고 여론조작하기 위한 공작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기관지 [[국민신보]]사, [[시천교]]회, [[자선부인회]]는 일진회에 영합했다. 또한 주변단체인 [[자혜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대한신문]]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의 앞잡이 행각을 담당하였다. 요약: 이음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음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