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프로파간다 역할 및 여론조작 선동 ==== 이어 일진회는 일제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여 국내의 여론을 이른바 '합방의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하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일진회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선언서' 기초 작성, 유세, 강연회 등의 매국행각을 감행했다. [[1909년]]에 이르러 일제는 사법권 및 감옥사무를 탈취하는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군부까지 폐지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했다. 또한 경찰권 강탈에 이어 [[1909년]] [[3월 26일]] [[출판법]]도 공포하는등 한국민의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에서 물러나고, 부통감인 [[소네 아라스케]]가 통감이 되었다가 무능하다 하여 곧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5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이 되었다. 데라우치 통감은 '한국병합실행에 관한 방침'에 따라 7월에 '병합처리방안'을 성안하여 일진회의 각의를 거쳐 이를 처결하였다. 이제 일제에 남은 하나의 조치는 이른바 '병합'의 공표만 남았다. 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 이토의 죽음에 대하여 일진회는 '사죄단'과 '동아찬영회'를 조직하여 이 기회에 일제 당국과 [[통감부]]에 잘보일려고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일제의 '대한강경파'인 가쓰라, 야마가타 등을 비롯한 그들의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스기야마 시게마루]] 등이 일진회의 합방성명을 조작하였다. [[1909년]] [[12월 4일]]에 발표한 일진회의 이른바 일련의 '합방성명서'는 [[경술국치]]가 단행되기 약 8개월 전의 일로서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성명은 일제가 조작한 여론 환기수단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성격으로 보아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기에 한국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켜 성토와 규탄의 대상이되었다. 그 근거로 [[대한매일신보]]는 지상을 통하여 이를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혹평하였을뿐만 아니라 중추원의장 [[김윤식]] 등은 [[송병준]], [[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기까지 했었으나 이는 일제의 비호로 묵살되었다. 궁지에 몰린 일진회는 그들 간부나 회원 중에서 퇴회하는 자가 속출하여 불과 수일 만에 90여 명에 달하였으며, [[이용구]]와 [[우치다 료헤이]]도 일본헌병대에 신변을 보호받아야만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용구]]등 일제 앞잡이들과 고문인 우치다 등이 결탁하여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한성보신사]], [[대한상무조합수]], [[국민동지찬성회]] 등 유명무실한 10 여개 단체를 사주, 매수하여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지지하도록 조작하고 일제 병탄을 합리화하는 매국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일진회의 성명서에 대한 반향(反響)에 의해서 스스로 반대세력의 폭과 깊이를 알아챈 일제당국은 이듬해 강합적으로 단행된 이른바 합방을 위한 최종적 마무리 작업을 용이하게 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1주일 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 강점당했다. 요약: 이음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음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