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조은신용조합]]의 불법송금에 조선총련 관계자의 관여가 의심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인 납치문제 추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납치사건을 비롯한 일본 국내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불법활동(간첩, 불법송금, 마약, 권총판매 등)에도 많은 수의 조총련 관계자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에 대해 조총련은 “악성 유언비어”라고 주장하고 있고, 조총련 관계 시설에 대한 강제수사에 대해서도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항의를 반복하여 왔다. 또한, 비판기사를 쓴 보도기관 직원에게 많은 항의를 하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판적인 단체의 집회를 조직원들이 폭력적으로 방해하였던 적이 있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재일조선인의 주권을 인정하면 역차별 등으로 이어진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1972년]] 당시 미노베 료키치 도쿄 도지사가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고 인정한 이래, 많은 지자체가 조총련 시설을 사실상 [[외교 공관]]이나 공공시설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고정자산세와 부동산취득세의 감면조치를 하여왔다. 이는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게 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ref>毎日新聞2007年6月14日朝刊</ref> 2003년 [[도쿄도]]는 조총련 관련시설에 대해 ‘소유자 거의 대부분이 관련 기업(조총련이 법인이 아닌 이유로)이거나, 외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일부에 대해 고정자산세를 부과하기로 하였다. 다른 지자체도 이에 따라 고정자산세 감면을 해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편, 종래대로 계속하려는 지자체도 있다. 조총련과 일부 법학자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행정소송에서 다투고 있다. 고정자산세 등의 감면조치를 둘러싸고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구마모토 모임’의 加納良寛 회장이 구마모토 시장을 상대로 조총련 시설 과세감면조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6년 2월 2일 후쿠오카 고등법원이 ‘공익성이 없는 조선총련의 활동에 대해 조세를 감면하는 것은 위법하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구마모토 시장이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기 때문에 최종적 결정은 대법원에 맡겨졌다. 또한 방위청(현 방위성)의 미사일 정보 유출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보도되었다. 조총련측은 이를 사실을 왜곡한 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 납치사건 관여 === 1973년 행방불명된 [[사이타마현]] [[가미후쿠오카시]] (현 [[후지미노시]]) 여자의 조선족 아동 2명이 납치(2아동납치사건)되었는데, 그 여성의 남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이었고, 게다가 그 남편이 근무하였던 도쿄 무역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전직 여직원이 경찰당국의 조사에서 ‘북한 본국의 판단을 요청했다’ 등으로 진술하였다.<ref>[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10AT1G0902X09042007.html 拉致、北朝鮮が指示か]{{깨진 링크|url=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10AT1G0902X09042007.html }} Nikkei Net 2007年4月10日</ref> 일본 정부는 조총련의 개입을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ref name="a">[http://www.shugiin.go.jp/itdb_shitsumon.nsf/html/shitsumon/b166475.htm 内閣衆質一六六第四七五号平成十九年七月十日] {{웨이백|url=http://www.shugiin.go.jp/itdb_shitsumon.nsf/html/shitsumon/b166475.htm |date=20110324062009 }} 平成十九年七月三日衆議院議 員河村たかし提出の「公安調査庁に関する質問主意書」に対する日本国政府の答弁書 衆議院</ref> * 1978년 6월 발생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ref name="a" />. * 1980년 6월 발생한 [[신광수 (1929년)|신광수]](辛光洙) 사건(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ref name="a" />. 2007년 4월 25일 경찰청 공안부는 가미후쿠오카시 사건에 관하여 국외이송목적 유괴 혐의로 사건에 관여하였던 혐의가 강한 공작원들이 한때 활동에 참가하였던 ‘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 중앙본부’(류학동) 등 조총련 산하단체와 관련단체 등 4개소를 가택수색하였다<ref>[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25AT1G2500925042007.html 拉致事件で警視庁が初捜索·朝鮮総連系団体] {{웨이백|url=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25AT1G2500925042007.html |date=20070708033656 }} Nikkei Net 2007年4月25日</ref>. 수색시 재일 조선인 남성이 공무집행방해로 체포되어 도미사카(富坂)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당시 혐의사실 고지는 하지 않았음), 5월 말 불기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ref>「[http://www.kinyobi.co.jp/KTools/antena_pt?v=vol657 金曜アンテナ] {{웨이백|url=http://www.kinyobi.co.jp/KTools/antena_pt?v=vol657 |date=20070927045846 }}」 週刊金曜日2007年6月8日号</ref>. 이에 관하여 가택수색 당시 수사관이 진입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으나 TV에는 보도되지 않았었다. 또한 공안부는 도쿄도내 무역회사에 다수의 공작원이 입사한 경위 등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조총련 서만술 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남승우 부의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기 위해 같은 날 서면으로 출석을 요구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6일 고덕우 부의장이 보도용 기자회견에서 거부하는 취지를 발표하였다<ref>[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26AT1G2601126042007.html 朝鮮総連、2児拉致での聴取要請を拒否] {{웨이백|url=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26AT1G2601126042007.html |date=20070428102424 }} Nikkei Net 2007年4月26日</ref>.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주장 ==== 1973년 재일조선인자제 실종사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아베 신조 정권]]이 일련의 일본인납치사건에 결부시킨 정치적 민족 탄압’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www1.korea-np.co.jp/sinboj/j-2007/02/0702j0425-00001.htm 朝鮮総聯中央本部広報室の強制捜索に関するコメント] {{웨이백|url=http://www1.korea-np.co.jp/sinboj/j-2007/02/0702j0425-00001.htm |date=20070429151717 }} 朝鮮新報 2007年4月26日</ref> === 대(對)대한민국 공작 협력 ===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남공작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기념일인 광복절 축하행사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개최되던 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의 처 육영수가 재일한국인 문세광에게 사살당했다([[육영수 저격 사건]]). [[문세광]]은 박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한국 경찰의 수사에 의하면 조총련의 관여가 명백하였다. 이것은 적화통일을 목표하였던 문세광이 조선총련의 지원을 받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시)|주오구]] 高津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쳤고 한국 위조비자와 위조여권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측의 주장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조총련의 관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반일감정이 높아져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후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일본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맺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조총련을 자극하지 않으려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제 이 시기의 중조관계는 [[문화대혁명]]의 영향과 [[김일성]]이 중소분쟁에서 소련측에 붙었던 까닭으로 냉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또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정일 총서기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하였기 때문에 조총련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공작에 관여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에 등장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종 기념우표에 등장하고 있다. 1965년 4월 27일 ‘총련결성 1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총련 건물을 배경으로 [[한일기본조약]]체결반대운동을 하는 군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 우정 당국은 1970년, 1975년, 1985년, 2005년에도 총련 건물이 그려진 우표를 발행하였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를 지상낙원으로 선전 === 1950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조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상낙원’ 등으로 선전하여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을 영주귀국, 이주시키는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을 펼쳤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 운동 === 재일조선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운동에는 산하단체인 [[중외려행사]](中外旅行社)<ref>http://www.chugai-trv.co.jp</ref> 가 일부 개입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1959년 12월에는 대한민국 공작원의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2000년대 들어 탈북자를 중심으로 잇따라 조총련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2008년]] 6월에는 일본 거주 탈북여성이 조총련에 대해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조총련 상대 손배소 탈북여성 ‘구겨진 인생’ 풀스토리|url=https://www.dailynk.com/%ec%a1%b0%ec%b4%9d%eb%a0%a8-%ec%83%81%eb%8c%80-%ec%86%90%eb%b0%b0%ec%86%8c-%ed%83%88%eb%b6%81%ec%97%ac%ec%84%b1-%ea%b5%ac%ea%b2%a8%ec%a7%84/|뉴스=데일리NK|위치= |날짜=2008-06-19}}</ref> 소송을 제기한 여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상낙원이다.’라는 조선총련의 거짓선전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노동, 고문, 차별을 강요당하였고, 죄수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당하였으며 ‘(조선총련은) 사람을 속여 조직적으로 유괴하였다. 인권과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빼앗은 악마와 같은 단체이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강제수용소 안에서 필사적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호소하였다. 조총련은 이러한 소송에 대해 ‘동포사회와 일북 관계를 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ref>2008年6月13日 朝日新聞、産経新聞</ref>. === 영화 ‘동해의 노래’ === 귀환사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총련이 공동제작한 영화 ‘[[동해의 노래]]’(2부작)가 2009년 12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영되었다<ref>[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05-00001.htm 朝鮮国内で大反響] {{웨이백|url=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05-00001.htm |date=20140226234257 }}, 朝鮮新報, 2010.2.5.</ref><ref>[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12-00003.htm 同胞愛の結晶、好評上映中の映画「東海の歌」 監督、出演者、独占インタビュー] {{웨이백|url=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12-00003.htm |date=20140226234259 }}, 朝鮮新報, 2010.2.12.</ref>. 영화는 주인공의 모델이 된 한덕수 前의장을 비롯한 제1세대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이국땅에서 ‘애국’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김일성 노선전환방침(1952년)과 총련 결성,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인한 민족교육의 발전과 귀국 실현까지 1940~5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된 사건을 그렸다.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왔던 한덕수 前의장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구체적 업적과 생애 및 재일조선인의 활동에 관한 홍보작품이기도 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첩과의 관계 === 2008년 8월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의 기소장에 의하면, 이 여간첩은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성적관계를 맺고 기밀정보를 얻는 ‘허니트랩’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는데, 2007년 6월부터 2008년 5월까지 3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최장 2개월 이상 체류하였다. 기소장에는 일본 협력자로 조총련 산하단체 간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과 ‘사장’ 직함을 가진 오사카 거주 인물 등 2명의 실명이 기소장에 기재되었다. 기소장에 올려진 산하단체 간부는 ‘조총련 관계 단체 간부로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피고와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보위부에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전혀 관계가 없다. 멋대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라며 관련을 부정하였다<ref>“[https://web.archive.org/web/20080902025034/http://www.yomiuri.co.jp/national/news/20080830-OYT1T00395.htm?from=main2 北の女スパイ日本で暗躍、指令「総連傘下団体幹部に会え」]”. 読売新聞. 2008年8月30日閲覧</ref>. === 연평도 포격 === 조총련은 [[2010년]]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에 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조선총련은 조직원 내부교양자료에서 연평도에서 숨진 민간인 2명은 연평도 주민이 아니라 해병대 시설 공사에 동원된 본토 사람이고, 숨진 장소도 군사시설 내부이므로 민간 희생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조총련, "민간인 희생자 없었다" 내부 선전|url=http://www.ytn.co.kr/_ln/0104_201011281719310061|뉴스=YTN|위치= |날짜=2010-11-28}}</ref> 그 이후로 일본 정부는 조총련계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미루었다.<ref>{{뉴스 인용|저자=이충원 특파원|제목=日, 조총련계 고교 수업료 지원 미루기로|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1/24/0200000000AKR20101124103051073.HTML|뉴스=연합뉴스|위치= |날짜=2010-11-24}}</ref> 일본 사회의 연평도 포격 비판 여론으로 2010년 12월 26일 일본 16개 도·현의 고교 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었다. 요약: 이음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음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2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분류: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