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

젊은리버럴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8월 29일 (목) 13:57 판 (새 문서: {{다른 뜻}} '''일진회'''(一進會)는 1904년 8월 송병준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단체이다. 1904년 8월 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해 9월에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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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一進會)는 1904년 8월 송병준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단체이다.

1904년 8월 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해 9월에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 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 하에 일본의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라는 이름은 '조선과 일본이 하나로 나가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의 일진(一進)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친일 단체이기 때문에 일진회(日進會)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한자 병기이다. 실제로 이 한자가 쓰였던 일진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쪽은 반일 및 항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개요

창립과정

일찍이 민씨 세도가문의 박해를 받아 10여 년간 일본에 망명하여 있던 송병준이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오타니 기쿠조 소장을 따라 군사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송병준은 정국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다가 한성부에서 전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 유학주 등과 빈번한 접촉 끝에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하고 임시 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했다. 8월 20일에 다시 특별회를 개최하여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다시 회장에 윤시병을,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때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칙령으로 경무사 신태휴로 하여금 그들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았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을 검속한다고 위협하여 그들의 회합을 옹호하였다.

일진회는 발족과 동시에 4대 강령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실을 존중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공고하게 할 것
  •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할 것
  • 정부의 개선정치를 실시하게 할 것
  • 군정과 재정을 정리하게 할 것

일진회는 창립의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비정(秕政)에 대한 국정개혁이나, 이 해 9월에 일진회의 급선무로서 회원의 일심단결의 표적인 단발착모와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해 10월 22일에 평의원 회의를 개최하고,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군략상에 조금도 방해가 없다는 뜻을 의결하여 이날 주한일본군사령관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 헌병대장 다카야마, 그리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전달한 공적 서한 내용에는 일진회가 추구하는 국정개혁이나 단발착모 등 표면상의 취지와는 달리 일제 침략에 동조하여 친일색채를 공공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일제대한제국 침략의 방향과 병행한 표리가 부동한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했다. 이때 각종 사회단체가 한성부를 무대로 활동하였을 뿐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일진회의 활동 역시 한성부를 무대로 하였을 뿐, 그나마도 대중의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일제의 보호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무렵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이해 9월 하순에 조직한 '진보회'는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개혁이나 갑진개화운동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하여 송병준은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한 결과, 이해 12월 2일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조직

이용구는 지방지부 회원의 거의가 진보회의 회원이라는 미명 하에 13도지방 총회장 직에 앉게 되었으며, 이면에서 일진회를 조종하던 송병준은 이듬해 평의원장(評義員長)에 취임하였다. 송병준은 일제의 계략적인 흉계에 호응하여 윤시병을 멀리하고 이용구를 매수하여 1905년 12월 22일 총회에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는 윤시병, 지방총회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을 선출하였다. 일진회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한편 일본군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아 활동했다. 일진회 회원은 창립 당시 300명, 진보회와 통합한 뒤 곧 수만의 회원이 되고, 한일 병합 이후에는 이른바 '100만의 회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실제는 10만명쯤 되었다. 이와 같이 조직된 일진회와 연계성을 가진 외곽단체나 주변단체가 또한 조직되어 일제와 일진회의 사주와 매수 공작에 의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일제 침략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는 한성부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군의 보호 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온 조직이 미미한 단체로부터 시작해 일본의 지원하에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전국적인 단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운영

일진회는 그 운영의 재정염출 문제에 대한 규칙을 보면,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의 재원도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기밀비에 의하여 운영되어왔다. 일진회가 매국적인 행각의 기치를 점차 선명히 내세움에 따라 일본 제국은 이를 이용하고자 5만원을 몰래 지원하여 특별한 보호를 하였고, 러일 전쟁 중 일진회 회원들의 일본군을 위한 수송, 정탐, 노역 등에 대한 일본군으로부터의 총영수고금 8만 9940원, 전쟁 종료 후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원씩의 기밀보조금, 이해 5월 15일 일본육군성으로부터 10만 원을 각각 교부받았으며, 이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보조금으로 26만원을 받았다. 또 송병준이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외무성 장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이토 히로부미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일진회가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등 일제 당국자들로부터 이따금 금품을 받아 매국 행위를 감행하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결국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결부되어 일제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일진회의 규칙에는 고문을 두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나 일진회의 배후에서 일본인 고문들이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일제 특히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로 구성된 고문이 그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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