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呂運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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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출생 | 1886년 5월 25일 조선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 |
사망 | 1947년 7월 19일 (60세)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암살됨. |
학력 | 배재학당 금릉대학교 |
직업 | 독립운동가, 저술가 |
종교 | 개신교 |
정당 | 근로인민당 |
신체 | 179cm, 80kg |
배우자 | 강릉 유씨(사별 초배부인) 진상하(재혼 계배부인) 천출 일본 여인(첩실) 진옥출(첩실) |
가족 | 여운일(형) 여운홍(남동생) 여윤숙(누이동생) 여운일(사촌 남동생) 여운혁(6촌 남동생) 여운각(6촌 남동생) 박찬기(생질) |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음력 4월 22일)[1]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였다.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2]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냈다. 구한 말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