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루카치 Georg Lukác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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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뢰빙게르 죄르지 베르나트 (Löwinger György Bernát) |
출생 | 1885년 4월 1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부다페스트 | |
사망 | 1971년 6월 4일 (향년 86세) |
헝가리 인민공화국 부다페스트 |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 무국적 → 헝가리 인민공화국 |
학력 | 빈 대학교 (중퇴) 헝가리 왕립 부다페스트 대학교 (철학) |
소속 정당 | 헝가리 공산당 (1919~1948)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1948~1956) 무소속[1] (1956~1967)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1967~1971) |
소속 학파 | 대륙 철학 신칸트주의 (초기) 신마르크스주의 (중후기) |
주요 저서 | 소설의 이론 (1916) 역사와 계급의식 (1923) 이성의 파괴 (1954) |
영향을 받은 인물 마르크스 · 칸트 · 헤겔 · 베버 · 소렐 · 레닌 · 룩셈부르크 · 키에르케고르 · 짐멜 | |
영향을 준 인물 사르트르 · 아도르노 · 호르크하이머 · 벤야민 |
개요
헝가리의 미학자, 철학자, 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와 더불어 신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개척자중 한명으로,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으며, 특히 미학 이론에 있어 그 어떠한 철학자들보다도 깊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생애
루카치는 1885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인 트란스라이타니아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헝가리인이었지만 유대계 헝가리인이었으므로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독일어에도 능통했다. 루카치는 독일 유학 과정에서 짐멜, 베버 등 저명한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신칸트주의자에 가까웠으나, 점차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탈인간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상이 변하면서,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워졌다. 1917년, 루카치가 30대일 때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루카치가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하는데 계기를 준다. 그러나 루카치는 2년 후 세워진 헝가리의 공산주의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가 정권이 붕괴되며 소련으로 도피해야했고, 30년간이나 망명 생활에 오르는 고생을 겪는다.
소련 시절, 루카치는 변변찮은 대접을 받았으나, 이로 인하여 운 좋게 스탈린의 대숙청을 비할 수 있었다.[2] 하지만 그는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정치가로서의 꿈을 접고, 정치나 사회 철학을 전개하는 대신 미학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 부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그는 공산화된 조국으로 돌아왔으며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명목상 최고 수준 이론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부분적으로 비판적이었던 루카치는 공산당 정권에 찍혔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임시 문화부 장관을 맡았던 것을 빌미로 헝가리 공산당 정부는 루카치를 공산당에서 출당시키고 루마니아로 추방시켰다.[3] 시간이 흘러 루카치는 헝가리에 귀국할 수 있게 되었고,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에도 복당되었다. 그러나 이미 80대의 고령이었던 루카치는 4년 뒤인 1971년, 회고록을 위한 구술을 마친지 1개월만에 숨을 거둔다.
이념
루카치는 게오르크 짐멜을 지도교수로 두어 박사 과정을 마친 인물이며, 따라서 베버, 짐멜 등 선대 독일 사회학자의 영향을 수용했다. 특히 칸트의 영향을 초기 상당히 받았다. 중후기 사상에서는 헤겔과 레닌,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철학적인 방향 속에서 루카치는 인본주의적 철학 이념을 사수하려는 일관적인 흐름을 보이며, 그러한 경향은 특히나 후기 철학에서 강화되었다.
루카치의 후대 철학자인 G. 파스테르나크 (G. Pasternack)에 의하면, 루카치의 미학이론은 초기, 중기, 후기에서 "미학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일관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 1) 원리로서의 탈 실용화: 통일적이고 직접적인 생활 연관의 구조적 중단
2) 총체성: 전체성으로의 지향을 지닌 작품세계의 구조적 완결성
3) 원리로서의 리얼리즘: 미메시스적 형성물의 구성과 현실 인상의 환기에서 이루어지는 미메시스적 재생산과 현실 경험의 연관화
4) 원리로서의 특수성: 감각적으로 명백한 것의 개별 보편화 가능성
5) 자의식화: 인간유의 자기의식으로서의 주체성의 탈개별화“
총체성(Totalität)
물화(Verdinglichung)
“ 부르주아지는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지불' 이외에 인간들 사이에 다른 어떤관계도 남겨놓지 않았다. “ — 카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中
미메시스(Mimesis)
“ kein Objekt ohne Subjeck
주체 없이 객체 없다.“ — 게오르크 루카치
휴머니즘적 예술
영향력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는 마르크스주의를 접근하는 두가지의 방식인 "인본주의"와 "과학주의"의 흐름에서, 인본주의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일컬어지는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대변되는 이 "비판 이론가"들은, 루카치의 물화 개념 등, 자본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루카치의 연구를 상당수 빌려와 후대에 발전시켰다.
한국 국문학에서도 루카치는 1990년대까지 주로 인용되는 철학자였으며, 현재는 그에 비해 인용 빈도수는 떨어지나, 여전히 "넘어야하는 미학의 높은 산"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다.
비판
한스 요나스를 위시로 한 반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루카치의 "인본주의성"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며 따라서 생명 윤리에 대해 별다른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루카치의 철학은 전면적인 재검토의 단계에 들어가는데,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주체성 위에 존재하는 "구조"에 대한 철학이며, 그러한 구조의 관계를 관찰하고 이를 통하여 구조를 타파하는 계급투쟁을 강조해야함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루카치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지나치게 인본주의에 평중되어있기 때문에 구조보다 인간이 앞서고, 따라서 진정한 혁명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알튀세르는 비판했다. 이러한 관점은 구조주의의 시각에서의 루카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알튀세르는 레닌에 대한 루카치의 해석이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여담
- 헝가리 내에서의 평가는 그의 명성에 비해 높지 않은 편이다. 공산 정권 시절, 루카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현실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이었으므로 공산당 고위 당직자들에게 미움을 샀다. 민주화 이후에 들어선 오르반 빅토르의 극우파 정권은 공산 정권 시대에 지어진 루카치 도서관과 동상을 철거하였다. 이렇듯 루카치는 학문적 성과에 비해 조국에서 박한 대우를 받고 있다.
각주
- ↑ 헝가리 혁명에 대한 참여 혐의로 인해 루마니아로 추방되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1967년 복당되었다.
- ↑ 그와 같이 망명길에 오른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장 벨러 쿤은 숙청당한다.
- ↑ 당시 루카치는 민주 사회주의 정권의 수장이었던 너지 임레와 같이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숨어있었는데, 헝가리 정부가 체포하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해 너지 임레와 같이 대사관 밖으로 나갔다가 숨어있던 KGB 조직원들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루카치는 너지 임레에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처형당하지 않고 루마니아로 추방되는 선에서 그쳤지만 너지 임레는 소련에서 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