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韓國民主黨 | |
약칭 | 한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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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명 | Korea Democratic Party |
이념 | 자유주의 보수주의[1] 반공주의[1] 빅텐트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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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 1945년 9월 16일(설립) 1949년 1월 26일(해체) |
선행조직 |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
후계정당 | 민주국민당 |
의석 | |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영어: Korea Democratic Party, KDP) 또는 단순히 한민당(韓民黨)은 1945년 9월 16일 결성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창당사가 좀 복잡한데, 한국민주당에 참가한 정당단체는 1945년 8월 18일 원세훈이 창당한 고려민주당, 8월 28일 김병로, 백관수 등이 창당한 조선민족당, 9월 2일 장덕수, 백남훈, 윤보선 등이 창당한 한국국민당, 9월 7일 송진우, 김성수 등이 조직한 국민대회준비회 등이었다.[2] 즉, 처음 시작은 좌우합작 형태로 시작한 빅텐트 성격의 정당이었다. 그러다 점점 호남 지주층 중심의 우익 세력들이 당 주류를 점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독립운동가들도 참여한 정당이었다.
1945년 9월 6일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은 한국민주당이라는 명칭으로 통합할 것을 선언하였고,[3][4] 여기에 국민대회준비회가 가세해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5] 초대 수석총무(당수)는 송진우였으나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의 총격에 암살되었고, 이후 임시 수석총무는 원세훈이 맡았다. 이 사이 정치부장 장덕수 역시 1947년 12월 2일 박광옥 등에게 암살되었다. 제2대 수석총무는 김성수가 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당시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부터는 찬탁에 서명한 뒤 미소공위 현장에서 반탁을 외치자고 종용하였다. 1946년 10월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우합작 7원칙'을 비난하다가 당내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탈당하는 사태를 겪은 뒤 호남을 비롯한 지역 지주 중심의 친일파 정당 인상이 강해졌다. 1948년 1월에 이승만의 단정단선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이 나뉘었던 때는 단정단선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다(독촉국민회는 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 아닌 범우익 사회단체였다). 1948년~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반공 따위를 명분으로 활동을 방해하였고, 이승만 정부도 이에 호응해버리면서 반민특위는 결과적으로 좌초되었다.[6][7][8][9]
1948년 7월 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 구성 때 이승만이 기존 약속을 어기고 한민당계 중에서 김도연 한 명만 입각시키자 사이가 틀어져 반이승만 세력화를 시작, 이에 열받은 이승만이 한민당의 돈줄을 끊기 위해 지주층을 박살낼 수 있는 농지개혁법을 추구하던 조봉암을 입각시키고 실제 법을 밀어붙이려 하자 반이승만 세력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다만 과거 한민당에도 김병로처럼 무상몰수 방식의 강경한 농지개혁법을 지지한 사람도 있었던걸 보면 당내 이견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지개혁법이 통과되기 전 1949년 1월 26일 당을 해산하였고, 1949년 2월 10일 대한국민당의 일부와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10][11]
논란 및 의혹[편집 | 원본 편집]
계보 논란[편집 | 원본 편집]
작가 장정일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결실"이라는 주장을 풍자했다. 그에 의하면 '44년 만의 진보 정당의 국회 등원을 '50년 만의 결실'이라고 부정확하게 반올림하는 것만큼이나 진보 정당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을 놓고 '50년 전통의 야당'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수사가 분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12]'이라는 것이다.
장정일은 또,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쇠멸하는 진로를 놓고 '50년 역사의 전통 야당'을 지켜 달라고 읍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50년 전통 운운은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진보 정당 의회 진출이라는 환희에 찬 구호와 달리 사기성이 짙은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새천년민주당의 기원을 1990년 1월 22일에 행해진 김영삼의 3당 합당에서부터 찾지 않고 한민당, 민국당, 신한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고자 한다면 안티조선 논객을 자청했던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 등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13]
역대 총선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연도 | 선거 | 지역구 | 비례대표 | 정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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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 당선비율 | 당선 | 득표율 | 당선 | 당선비율 | ||||||
1948년 | 1대 | 23/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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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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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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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 원본 편집]
- ↑ 1.0 1.1 윤덕영, 2016년, 1946년 전반 한국민주당의 재편과 우익정당 통합운동. 사학 연구 제121호. pp. 316-317, 329-330.
- ↑ “國史館論叢 第58輯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Ⅲ.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한국민주당발기회 개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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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 ↑ “한국민주당 결당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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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 ↑ “韓國民主黨과 大韓國民黨이 통합한 民主國民黨 결성대회 개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7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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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 원본 편집]
- 한국민주당 선전부, 《한국민주당소사》 (한국민주당, 1948)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55, 56쪽.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 편 1, 2》(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 편 2》(인물과사상사, 2006)
-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도서출판 에디터, 2000)
- 이기택,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1987)
-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1》(도서출판 풀빛, 1982)
-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1994)
- 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